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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고백

백른 꽃말 합작 참가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앞머리를 간질이고 떠났다. 꽃샘추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차갑던 공기는 4월이 되어서야 겨우 지나갔다. 답답하던 겉옷을 한 겹이나마 벗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몸을 노곤하게 만드는 햇빛이 기분 좋았다. 민현은 뒤늦게 찾아온 몸을 만끽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혼자 화보 찍냐?”

 

툴툴거리는 말투가 민현의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했다. 허공을 향해 치켜들었던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불만으로 가득 찬 동호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집게와 쓰레기 봉지가 들려 있었다. 자신의 손에도 똑같은 것들이 쥐어져 있다는 걸 자각한 민현은, 그제야 자신들이 교정 정화 봉사활동 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민현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다가 동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밀었다.

 

“야, 나 정도면 일상이 화보지.”

“웃기고 있네.”

 

동호는 콧방귀를 뀌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민현은 이상한 억울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평소에는 나 잘생겼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고 다니면서! 민현은 작게 꿍얼거리며 허리를 숙여 쓰레기를 줍는 것에 다시 집중했다. 운동장 곳곳에 자리한 쓰레기는 종류도 참 다양했다. 학생들이 대충 버리고 간 빵 봉지나 휴지들,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담배꽁초까지. 한참 쓰레기를 줍고 있으니 동호가 투덜거리는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냐고……”

“네가 늦게 일어나서 그렇잖아, 동호야. 덕분에 나까지 지각하고.”

“아니,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늦잠도 좀 잘 수 있고 그런 거지!”

 

날씨가 좋은 거랑 늦잠이 무슨 상관이야…… 민현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지금 이 말을 했다간 동호는 단단히 삐질 테고, 하루 종일 저와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맞다, 민현아.”

“왜.”

“나 신입생한테 고백 받았다?”

“뭐?”

 

민현은 막 집었던 쓰레기를 놓치기까지 하며 동호를 돌아보았다. 동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만면 가득 띠우고 있었다. 민현은 표정이 굳고 피가 차갑게 굳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에 동호의 교실이 소란스러웠던 이유가 이것인 모양이었다.

 

“역시, 내가 너보단 못해도 잘생기긴 했나봐.”
“언제, 어디에서? 누구한테 받았는데?”

“응? 어, 엊그제 하굣길에.”

 

젠장. 민현은 저도 모르게 빠득 이를 갈았다. 엊그제라면, 민현이 담임과 상담을 하는 바람에 동호가 혼자 귀가한 날이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상담을 미루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니. 민현은 저도 모르게 집게를 쥔 주먹을 꽉 쥐었다. 딱 하루 자리를 비웠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아니, 그것보다는 신입생 환영회에 동호를 참석시킨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 동호를 보고 뭐라 수군거리던 신입생들을 봤을 때 불길한 기분이 들었었지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러면 안됐는데. 민현은 제 실수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계속 이를 갈았다.

 

“야, 근데 귀엽더라. 역시 동생이라 그런가?”

“동호야, 겨우 두 살 어려.”

 

아, 짜증나. 민현은 운동장의 모래를 신발코로 헤집으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제 눈에도 예쁘니 다른 사람의 눈에도 예쁘겠지. 그런 생각에 배알이 꼴렸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래도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강동호가 다른 사람에게 갈 리가 없다는. 그 믿음을 배신당한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다. 민현의 기분이 저기압이라는 것을 알아챈 동호가 살살 눈치를 보았다. 민현은 어깨너머로 그것을 느끼면서도 동호를 향해 등을 돌리지 않았다. 괜한 마음에서였다.

 

“어, 근데……거절했어.”

“정말?”

“응.”

 

거절했다는 말에 민현이 반색을 표했다. 꽃이 피는 것 마냥 환하게 밝아지는 얼굴이 우스웠다. 동호는 끄덕끄덕,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렇지. 강동호가 나를 두고 딴 년놈을 만날 리가 없지. 민현은 언제 꿍했냐는 듯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동호는 그런 민현의 뒤통수를 향해 헛웃음을 한 번 던지고는 자신도 쓰레기를 줍는 일에 열중했다. 중앙으로 갈수록 쓰레기는 적었다. 한참동안 숙이고 있던 허리를 겨우 핀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운동장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소담하게 꾸며진 화단이었다. 마침 한창 꽃이 필 시기여서, 화단은 형형색색의 꽃으로 빼곡했다. 둘은 그 앞에 서서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여기도 치워야 하나?”

“음…… 아마 해야겠지?”

 

둘은 꽃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화단 안으로 들어섰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팬지와 튤립이 가득 핀 화단은 교실 하나 정도의 크기였다. 어디서 개량종을 가져온 것인지, 팬지의 꽃잎이 꽤 컸다. 민현은 튤립 사이사이에 숨은 쓰레기를 찾아내느라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팬지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간 동호는 쓰레기보다는 꽃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땅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쓰레기를 파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군가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것에 반응하여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눈앞에는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가 있었다.

 

“으아아아악!!”

 

민현의 비명이 고요에 잠긴 교정을 쩌렁쩌렁 울렸다. 동호는 배를 잡고 넘어갈 듯이 웃었다. 그의 손에 들린 지렁이는 격렬하게 몸을 꿈틀대더니 곧 땅 속으로 돌아갔다. 민현은 아직도 펄떡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현의 얼빠진 표정을 본 동호는 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으하항, 화, 황민현, 진짜 못생겼어, 으하하하!”

“……아, 강동호!”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민현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동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예 허리를 숙이고 끅끅거리며 웃음을 토해내는 것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민현은 창피함과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를 지르며 동호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잽싸게 민현의 손을 피한 동호가 나 잡아봐라, 따위의 소리를 하며 꺄르륵 웃었다. 그렇게 민현과 동호는 화단 곳곳을 빙빙 돌며 때 아닌 추격전을 벌였다. 둘의 발 아래에 짓밟히는 꽃이 단 한 송이도 없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황민현 달리기 완전 못해~!”

“니가 빠른 거거든?!”

 

동호는 생글생글 웃으며 민현을 돌아보았다. 평화로운 4월의 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여름에 태어났으면서도, 그것도 푸르른 바다의 곁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동호는 봄을 닮았다. 늦가을을 닮은 민현이 손에 넣지 못한 따스함을 간직한 사람. 그의 밝은 갈색 눈동자에 닿아 부서지는 빛의 조각이 잠시 민현의 혼을 뺏어놓았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을 잃은 민현이 휘청, 몸의 균형을 잃었다.

 

“어, 어어!”
“으악!”

 

민현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동호도 덩달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땅으로 넘어진 동호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부드러운 화단의 흙이 충격을 줄여준 덕에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민현은 아찔한 머리를 흔들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깐 점멸했던 시야가 다시 선명해지며, 동호의 가슴팍이 눈앞에 넓게 펼쳐졌다. 민현은 그제야 자신이 동호를 덮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라는 것을 자각했다. 동호도 그것을 뒤늦게 눈치 챈 모양이었다.

 

“……어.”

“어어……”

 

민현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동호도 동그랗게 떠진 눈을 끔뻑거리며 민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산들바람이 불어와 화단의 꽃을 흔들었다. 둘의 주위로 가득 핀 빨간 튤립들이 바람에 맞춰 흔들리며 향기를 퍼뜨렸다. 달콤한 꽃향기에 정신이 잠시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민현과 동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햇살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4월이 내린 축복 같은 빛이었다. 귀여운 튤립 꽃봉오리 사이에 파묻힌 강동호는, 웃기게도 아주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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